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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된 하늘

 

이진성(소노아트컴퍼니)

 

  여린 코발트 빛 하늘과 잔잔한 구름의 여운, 그리고 아스라하며 소소한 소재들이 등장하는 강석태의 작품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하늘이다. 2012년 《하늘을 보다》展과 2013년《Reread_ 어린왕자에게 말을 걸다》展 그리고 2014년《긍정적인 구름》 展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작품군들에서 뚜렷하게 보이는 것은 작가의 시선이 던져지는 공간으로써의 하늘 풍경이 담겨 있다는 점이다.‘하늘’에 대해 작가는 자신의 시선이 머무는 공간으로 규정짓고, 특히나 구름은 본인의 생각과 마음이 머무는 공간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하늘을 보다_ 작가노트 중에서)

 

  이러한 작가 본연의 이야기를 할 즈음부터 현재까지 작가의 시선은 거기에 머무르고 있으며, 그곳이 작품의 시작점임을 알 수 있다. 물론 끝임 없이 표현되는 하늘에는 색감에 대한 고민과 구름 형상에 대한 작가의 사색이 공존한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작가 스스로는 구름을 여백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는 하늘에 구름은 유형의 것이며, 구름을 제외한 공간을 그저 하늘이라는 무형의 공간으로 인식하기 마련인데 말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작가 미야자키 하야오(Miyazaki Hayao), 그의 영화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파란 하늘과 하얗고 뭉실뭉실한 구름들은 시청자들을 그지없이 기분 좋게 만든다. 여러 편의 다양한 주제들 속에서도 하늘과 구름은 늘 비중 있게 그려지곤 한다. 게다가 극중 주인공들은 여러 가지 도구들을 이용해서 구름 사이사이 하늘 위를 누빈다. 어쩌면 하늘을 누빈다는 말보다는 하늘에서 떠다닌다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한 표현일 듯싶다. 그의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필시, 원작자가 하늘을 좋아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추측을 하게 된다. 실재 미야자키 하야오는 비행사를 꿈꾸며 유년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그런 사실을 알고 보든 모르고 보든지 간에 고운 하늘 빛깔과 구름은 오래도록 잔상으로 남는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에서 하늘과 구름의 표현들을 예로 든것과 같이 우리 주변에 이러한 예들은 무궁무진하다. 비단 존 듀이(John Dewey)가 『경험으로서의 예술(Art as Experience)』에서 설명한 일상생활의 평범한 경험일지라도 이를 하나의 체험으로 인식하게 되는 순간 지니는 미적 경험의 본질에 대한 이론을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말이다.

 

  강석태에게 있어서 ‘하늘’과 ‘구름’에는 어떠한 경험들이 존재하는지, 금번 전시 《긍정적인 구름》에서 작가는 왜 구름을 긍정적이라고 표현하게 되었는지, 이러한 물음들의 답은《하늘을 보다》 전시에서 찾을 수 있겠다. 그 전시를 통해서 작가는 본인의 이야기를 비로소 시작했다고 보여 진다. 지치고 힘든 일상이 주는 무거운 어깨를 기댈 곳 없이 멍하니 바라다본 하늘에서 삶의 위안을 찾았다. 그렇게 시작된 작가의 시선은 예전의 작업들을 다시 읽게 되는 계기가 마련되었고(《Reread_어린왕자에게 말을 걸다》), 이제는 일련의 작업과정을 통해 스스로 치유의 방법을 찾게 되었다. 이와 같은 여정들은 작가가 경험했던 인생의 경험치, 사유의 깊이와 유관한 연관성을 지닌다. 그러면서도 작가의 현재 심리상태를 잘 드러내고 있다. 그렇게 탄생된 작품군이 “긍정적 구름”이다. 심미자의 심상에 따라 때로는 호랑이의 형상으로도 보이고, 또 어떤 때는 하얀 깃털을 펄럭이는 날개로도 보일 수 있는 구름 말이다.

 

  작가에게 이러한 의미가 있는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선택된 표현기법을 살펴보면, 이 또한 일반적이지는 않다. 전통 초상화 기법에서 쓰였던 배채법(背彩法; 화면의 뒷면에서 천천히 색을 올리는 방식으로 자연스러운 색감 표현을 위해서 사용하던 방법)과 탁본방식을 취하고 있다. 장지를 여러 번 물들이고 말리는 과정을 반복한 뒤에야 마음에 드는 빛깔을 찾는 수고스러움도 단순하게는 장지에 물감을 칠하는 방식이 아닌 것은, 일면 본인이 원하는 하늘에 대한 색감적인 욕망에 기인한다. 시간과 노동이 배가 되는 작업의 반복을 택한 것도 이러한 인식에 있다. 작가의 이러한 수고스러운 작업 방법은 비단, 매체를 만드는 장지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상과 같은 방식으로 완성된 작품을 통해 부단히 쌓이고 쌓여서 비로소 드러나는 시간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수고스럽지 않은 작업이 어디 있겠느냐만은 번거러운 밑 과정들에 대해서 우리는 흔히 일괄해 버리기 쉽다. 눈에 드러나기 쉽지 않다는 이유로 혹은 표면화되지 않는 다는 점에서 무심하게 넘기곤 한다. 하지만 반복되는 작업 과정의 시간과 노고를 쉽사리 차용할 수는 없다. 작업은 정직하다. 어떤 것보다도 정직하다. 그래서 작업자가 가지는 그때그때의 감정까지도 작품에 녹아있기 마련이며, 어떠한 수고스러움이 배어 있는지도 눈으로 읽히고, 마음으로 전달된다. 마치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한 지식의 얄팍한 껍데기를 머리에 쓰고 있다고 해서 자기 철학이 되지 않듯이 말이다. 오히려 진솔한 작가적 이야기가 훨씬 설득력 있게 작품에서 매력으로 발산되곤 한다. 그런 점에서 강석태의 작업은 부단한 노고에 기인한다. 이러한 노고 때문에 그가 표현하는 하늘빛은 묘하게도 끌림을 준다. 그러한 끌림은 작품 속 드로잉 요소들에서도 잘 어우러져 표현된다.

 

  최근의 세 전시에서 작가는 그간 본인이 표출하지 못하고 내재해 왔던 갈증을 그야말로 내뿜고 있다. 하고자 하는 이야기, 보여주고자 하는 이야기가 많기에 가능한 일이다. 일련의 작업에 이어 과연 이후 작가의 작품은 어떤 근간을 이루면서 나오게 될지 자못 궁금해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작품을 통해서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경험 치로서의 치유 대상이 된 하늘에 대한 이야기인지, 또는 자신의 시선이 머물던 공간으로써의 하늘인지, 혹은 둘 다인지. 작가는 작품으로 이야기 한다고 하지 않던가. 추측컨대 작가는 이런 둘 다의 의미가 내포된 이야기를 담고 있는 듯하다. 그가 감정적으로 위안과 위로를 받았던 대상에 대한 담담한 태도로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나온 본인의 감정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이는 마치 하늘과 구름의 다양한 추상적 문양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심미안에 의해 일관된 모습으로 규정되거나 잔상이 기억되지 않는것과 같다. 강석태의 작품에 드리워진 ‘하늘과 구름’들 역시 이와 같아서 바라보는 이의 시선에 따라 각자의 색과 형으로 감상 될 것이다. 이것이 또한 관람객의 몫이라 여겨진다. 각자의 경험들에 기인해서 보일 테니까 말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일상적인 생활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자연계의 대상에게도 작가의 시선과 일반인의 시선은 어떻게 달리 보이는지, 혹은 어떠한 공통된 시사점이 있는지를 찾아 볼 기회가 될 것으로 본다.